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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이걸 더 쓸 것인가 말 것인가. by 리힐

청년은 수려한 얼굴 가득 깊은 사색의 빛을 담은 채 벤치 옆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까지 내린 비로 아직까지 흠뻑 젖은 벤치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는 뜻이었지만, 구마엘은 그렇다고 상대가 현명하다는 판단 역시 할 수 없었다. 궁상맞게 쪼그려앉아 있는 청년의 긴 웃옷자락은 이미 흙과 물의 조화로운 배합에 자신의 몸을 맡겨버린지 오래였으니까. 그 옷이 재단사로부터 바로 나흘 전에 받아온 새 옷임을 생각해내고 구마엘은 몹시 슬퍼졌다.

"전하."

그 부름에 청년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

"쉿. 지금 반역모의 중인 게 안 보여?"

스스로 역심을 고하는 주인의 말에 구마엘은 청년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땅을 내려다본 뒤 침착하게 되물었다.

"개미랑 말입니까?"
"전부터 이 나라의 지배체계에 불만이 많았다는군. 전 병력으로 날 지원하겠다고 응해왔어. 우선 적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식품창고를 기습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던 참이야."

구마엘은 상념에 잠겼다. 22년전 지엄하신 황가의 핏줄을 떠맡다시피 안았을 땐 그 어린애가 이렇게 자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한 열 살 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귀여웠던 것 같다. 정신도 좀 멀쩡했던 것 같고. 저 대사도 10년쯤 전에 들었더라면 그저 전하 참 귀여우십니다. 하고 웃으며 말해줄 수 있었을텐데.

"전하의 습격에 대해서라면 시녀장이 새 자물쇠를 두 개 더 다는 걸로 대응하기로 한 것 같더군요."
"좀 더 전략을 구체화해야겠군. 그런데 왜 왔어?"
"전하의 시종이니 전하 뒤를 따라다니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 것 치곤 난 자네를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전하께서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넘어 방을 탈출해버리셨기 때문이죠. 제가 따라다니길 바라신다면 앞으로는 꼭 문을 이용해 주십시오."
"알았어. 계속 창문을 이용하도록 하지."

이렇게 회피당할 정도로 자신이 문제가 있는 시종이었던가. 시름에 잠긴 얼굴로 변해버린 구마엘을 보며 청년이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우중충한 얼굴이구만. 역시 40대면 늙은 거라니까."

자신이 아직 30대라고 정정해주는 대신 구마엘은 22년간의 노하우를 펼쳐 조용히 귀를 틀어막아 이어지는 몇 마디의 헛소리를 차단했다. 그리고 청년은 주인의 말을 귀를 막고 무시하는 시종의 태도에도 화는 커녕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고?"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어차피 듣고 있을 거라는 건 다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부르신 건 지금이지만 좀 늦게 가셔도 됩니다."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에게 구마엘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웬델 백작부인께서 술통 네 개과 함께 내실에 드신지 정확히 반 시간 됐습니다."

황제의 사촌이며 나이 열 여섯에 가출해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용병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 그 놀람이 지나쳐 몇몇 사람들은 졸도하고 말았지만. - 그녀의 일생 목표는 황제를 술로 침몰시키는 것이다. 네 개의 술통과 그녀가 황제를 붙들었다면 적어도 그게 다 비워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주변에 갈 수 없었다. 술취해 휘두르는 그녀의 검에 어딘가를 잘려 아내에게 이혼당했다는 어떤 시종의 뒤를 잇는 괴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좋아. 저녁 식사 후에 들어가도 되겠군."

짝, 박수까지 치며 반겨하는 그를 보며 구마엘은 다시 한 번 시름에 잠겼다. 평탄치 못한 인생을 사는 주인을 섬기는 죄로 똑같은 흔들다리 인생을 살아야 하는 시종에게 주인이 또 뭔가 떨떠름한 뭔가를 떠안을 것 같다는 예감이란 검은 고양이에게 머리털을 뜯기는 것보다도 더 나쁜 징조다.

"좋아. 그럼 일단 나는 좀 할일을 하러 가보실까."
"또 어딜 가십니까?"
"뻔한 걸 묻기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의 사고범위 이내에선 결코 뻔한 게 아닐 게 분명한 답을 기다리며 구마엘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꿨던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뭘 꿨더라. 호박? 호박이 나왔었던가? 분명 커다란 호박이...

"시녀장의 자물쇠를 점검하러 가야지. 한 번 딸 수 있는 건가 봐야겠어."

발등을 찍고 턱을 올려친 뒤 집채만하게 커져 자신을 깔아뭉갰었다. 그리고 22년 전 왕녀의 아비 모를 사생아를 떠안았던 그 날도 분명 그 것과 다르지 않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시름의 늪에 푹 잠긴 채 그는 경쾌하게 앞서가는 청년의 흙투성이 재킷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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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각은 이 정도까지 정신이 나가진 않았었는데 쓰다보니 정신이 너무 나가서 이건 무엇인가 하는 상태의 인간이 되어버렸다.
넌 무어냐 이 두억시니같은 생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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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샤릿 2009/10/31 05:51 # 답글

    ...농담도 빈말도 아니고 진짜 좋다니까. 대박이라니까?
    쓰란 말여 좀 쓰라고 쓰자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날 바 누나의 반의 반도 안되는데 책 냇잖아ㅜㅜㅜㅜㅜㅜㅜ폭풍눈물
  • 리힐 2009/10/31 12:11 #

    불가능한 꿈을 치우라! 아무리 아부해도 나오는 건 없다!
  • 김체셔 2009/10/31 23:16 # 답글

    저 뒷내용 보고 싶어요ㅠㅠㅠ 너무 보고 싶어요ㅠㅠㅠㅠ
  • 리힐 2009/10/31 23:23 #

    저한테서 그런 게 나올 리 없단 거 잘 아시죠. 그쵸?u////u
  • 레스 2009/11/01 22:32 # 삭제 답글

    나올 거라고 믿어볼래요 꿈★은 이루어진다!/싸닥
    두억시니라니 미친듯이 눈마새를 독파하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1년도 안 됐지만.
    그 뒤로 어쩐지 피마새는 건들 수가 없습니다 사모누님을 돌려줘!<
  • 리힐 2009/11/01 23:45 #

    전 최근에 다시 읽어본 뒤 눈마새보다 피마새 쪽이 뭔가 더 취향에 맞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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